맨위로가기

장 뒤뷔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 뒤뷔페는 1901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985년 사망한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그는 아르 브뤼(Art Brut, 원시 예술)라는 개념을 창시했으며,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비전문가들의 예술 작품에서 독창적인 표현을 발견했다. 뒤뷔페는 유화에 모래, 타르, 짚 등을 섞어 두껍게 표현하는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했으며, 아스팔트를 사용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작품은 1946년 파리에서 개인전을 통해 처음 공개되었고, 이후 미국에서도 전시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조각에도 관심을 가져 대형 조각 작품을 제작했으며, 로잔에 아르 브뤼 컬렉션을 설립하여 아르 브뤼 작품을 연구하고 전시하는 데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FrenchSculptureCensus template with no id set -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
    18세기 프랑스의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는 르무아네의 제자가 되어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대리석 및 도자기 조각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러시아에서 표트르 1세의 기마상을 제작하고 예술 이론에도 기여했지만 과장된 경향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 FrenchSculptureCensus template with no id set - 콘스탄틴 브랑쿠시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루마니아 출신의 조각가이자 20세기 초 추상 조각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대상을 단순화하고 본질을 추구하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여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파타피직스 관련자 - 알프레드 자리
    프랑스 작가이자 극작가인 알프레드 자리는 희곡 《위뷔 왕》으로 부조리극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파타피지크'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제시하여 현대 철학과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 파타피직스 관련자 - 마르셀 뒤샹
    마르셀 뒤샹은 큐비즘의 영향을 받아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레디메이드 개념을 발전시키고, 20세기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랑스 출신의 예술가이다.
  • 1985년 사망 - 에프렘 짐발리스트
    러시아 제국 출신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육자인 에프렘 짐발리스트는 레오폴트 아우어의 제자로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명성을 얻었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은퇴 후에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 1985년 사망 - 김기진
    김기진은 팔봉이라는 호를 사용한 한국의 문학평론가, 소설가, 시인으로, KAPF에서 활동하며 경향파 문학 이론을 이끌었으나 친일 행적을 보였고 광복 후에는 반공주의 문인으로 활동했다.
장 뒤뷔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0년의 장 뒤뷔페
1960년 장 뒤뷔페 (파올로 몬티 촬영)
본명장 필리프 아르튀르 뒤뷔페
출생1901년 7월 31일
출생지르 아브르, 프랑스
사망1985년 5월 12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국적프랑스
직업화가
조각가
활동
사조파리 학파

2. 생애

뒤뷔페는 1901년 7월 31일 프랑스 르아브르에서 와인 도매상을 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1] 어린 시절 친구로는 작가 레몽 퀘노와 조르주 랭부르가 있었다.[2] 1918년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회화를 공부했지만,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독학으로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3]

1925년 르아브르로 돌아와 결혼 후 파리에서 와인 사업을 시작했지만, 1934년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베르시에서 와인 사업을 하며 독일 국방군에 와인을 공급하여 이익을 얻기도 했다.[1]

1942년, 뒤뷔페는 본격적으로 예술 활동을 재개하며, 일상적인 소재를 강렬한 색채와 독특한 기법으로 표현했다. 1944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이후 아르 브뤼 개념을 정립하며 비전문가들의 예술 작품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 힘썼다. 1948년에는 장 폴랑, 앙드레 브르통 등과 함께 아르 브뤼 협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뒤뷔페는 1985년 파리에서 사망할 때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3] 1960년에는 파리 장식 미술관에서 402점의 작품이 전시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주요 전시회는 다음과 같다:

연도전시회명장소작품 수
1944갤러리 르네 드루앵파리
1946갤러리 르네 드루앵파리
1951피에르 마티스 갤러리뉴욕29점
1955현대 미술 연구소런던56점
1957슈태티셰스 미술관레버쿠젠87점
1958아서 투스 앤 손스런던31점
1959피에르 마티스 갤러리뉴욕77점
1960아서 투스 앤 손스런던40점
1960케스트너-게젤샤프트하노버88점
1960장식 미술관파리402점
1960하노버 갤러리런던27점
1962현대 미술관뉴욕85점
1962로버트 프레이저 갤러리런던60점
1963갤러리아 말보로로마68점
1964로버트 프레이저 갤러리런던18점
1964팔라초 그라시베니스107점
1964-5스테델릭 미술관암스테르담198점
1964-5갤러리 잔 부셰파리18점
1964-5갤러리 클로드 베르나르파리46점
1965갤러리 바이에르바젤88점
1965김펠 하노버 갤러리취리히34점
1966현대 미술 연구소런던76점
1966로버트 프레이저 갤러리런던13점
2001장 뒤뷔페: 100주년 기념 전시퐁피두 센터, 파리
2019장 뒤뷔페: 유럽의 야만인유럽 및 지중해 문명 박물관(MuCEM), 마르세유[23]
2021장 뒤뷔페: 잔혹한 아름다움바비칸 아트 갤러리, 런던


2. 1. 초기 생애 (1901-1942)

뒤뷔페는 르아브르에서 부유한 와인 도매상의 아들로 태어났다.[1] 어린 시절 친구로는 작가 레몽 퀘노와 조르주 랭부르가 있었다.[2] 1918년,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3] 그곳에서 화가 후안 그리스, 앙드레 마송, 페르낭 레제와 교류했다. 그러나 6개월 후, 전통적인 미술 교육에 싫증을 느껴 아카데미를 나와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4]

이 시기에 뒤뷔페는 자유 노이즈 음악,[5] 시, 고대 및 현대 언어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4] 이탈리아와 브라질을 여행하기도 했으며, 1925년 르아브르로 돌아와 첫 번째 결혼을 하고 파리에서 작은 와인 사업을 시작했다. 1927년 폴레트 브레와 결혼하였고, 1929년에 딸이 태어났다.[4]

1934년, 뒤뷔페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미술사조를 강조한 일련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나 독일의 프랑스 점령 기간 동안 베르시에서 와인 사업을 발전시키며 그림을 중단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독일 국방군에 와인을 공급하여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고 자랑했다.[1]

2. 2. 예술 활동 재개와 아르 브뤼 (1942-1960년대 초)

1942년, 뒤뷔페는 예술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파리 지하철 승객이나 시골을 걷는 사람들처럼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선택했다. 야수파의 색채와 다리파 화가들의 불협화음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좁은 공간에 놓인 인물들을 특징으로 하여, 감상자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주었다.[6] 1944년 10월, 파리의 르네 드루앙 갤러리에서 뒤뷔페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이것은 기성 예술가가 되기 위한 그의 세 번째 시도였다.[4]

1945년, 뒤뷔페는 장 포트리에의 회화 전시회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포트리에의 작품에서 인간의 깊이를 순수하게 표현하는 예술을 발견했다. 뒤뷔페는 포트리에를 따라 진흙, 모래, 석탄 가루, 유리 조각, 끈, 석고, 시멘트, 타르 등을 섞은 두꺼운 유화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붓 대신 긁힌 자국이나 칼자국을 남기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이러한 임파스토 기법은 1946년 르네 드루앙 갤러리에서 열린 ''Microbolus Macadam & Cie/Hautes Pates'' 전시회에서 'Hautes Pâtes' 시리즈로 잘 나타났다. 그의 조악한 재료 사용과 아이러니는 비평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4]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뒤뷔페는 미로 이후 파리 화파에서 나온 가장 독창적인 화가"라고 평가했다.[7]

1946년 이후, 뒤뷔페는 앙리 미쇼, 프랑시스 퐁주, 조르주 랑부르, 장 폴랑 등 친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이 초상화를 두꺼운 재료를 사용하고 반(反)심리적, 반(反)개인적인 방식으로 그렸다. 몇 년 후, 그는 초현실주의 그룹과 파타피지컬 대학에 접근했다. 그는 앙토냉 아르토와 친분이 있었고, 루이-페르디낭 셀린을 존경했으며, 앙드레 마송을 중심으로 한 예술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뒤뷔페는 1946년 피에르 마티스 전시회에 참여하며 미국 미술 시장에서 빠르게 성공했다. 마티스는 현대 유럽 미술의 영향력 있는 딜러였으며, 뒤뷔페의 작품은 피카소, 브라크 등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1947년, 뒤뷔페는 미국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7]

''Corps de dame jaspé [여인의 대리석 몸]'' (1950)


1947년부터 1949년 사이, 뒤뷔페는 알제리를 세 번 방문했다. 그는 유목민 부족의 덧없는 삶에 매료되었고, 이는 아르 브뤼의 한 측면이 되었다. 1948년 6월, 뒤뷔페는 장 폴랑, 앙드레 브르통 등과 함께 파리에서 ''라 콩파니 드 라르 브뤼''(La Compagnie de l'art brut, 아르 브뤼 컴퍼니)를 설립했다.[10] 이 협회는 아르 브뤼를 발견하고, 기록하고, 전시하는 데 헌신했다. 뒤뷔페는 알로이즈 코르바와 아돌프 뵐플리를 포함한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했으며, 이 컬렉션은 현재 스위스 로잔의 아르 브뤼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Barbe des combats [전투 수염]'' (1959)


한스 프린츠호른의 저서 ''정신병자의 예술성''의 영향을 받은 뒤뷔페는 정신과 환자, 수감자, 어린이 등 비전문가들이 제작한 예술을 ''아르 브뤼''(art brut, "원시 예술")라고 명명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학문적인 예술보다 더 많은 예술과 시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르 브뤼처럼 지적인 관심사에서 자유로운 예술을 창조하고자 했으며, 그의 작품은 종종 원시적이고 유치하게 보인다.[12] 그의 형태는 벽 낙서나 어린이 그림에 비유되기도 한다.[12]

1945년 7월, 뒤뷔페는 스위스 베른 근교의 정신병원에 있는 작은 미술관을 방문하여 아돌프 뵐플리 등의 작품을 보고 감동받았다. 그는 여러 정신병원을 방문하며 작품을 수집했고, 1947년에는 '생의 예술 센터'(포와이에 다르 브뤼)를 개관했다. 1948년에는 아르 브뤼 협회를 설립하여 컬렉션을 보관하고 연구했다. 1951년에는 100명의 작가에 의한 1200점의 컬렉션이 완성되었지만, 자금 부족 등으로 협회는 해산되었다.

뒤뷔페의 컬렉션은 1967년 파리 장식 미술관에서 처음 전시되어 공적으로 인지되었다.[32] 1976년, 스위스 로잔에 아르 브뤼 컬렉션이 개관했다.

2. 3. 국제적 명성과 후기 활동 (1960년대 중반-1985)

1959년 2월, 파리 시립 근대 미술관 관장과 영국으로부터 프랑스 회화전 초대를 받았으나, 영국 측의 예술 훈장 수여에 반대하며 "예술의 진정한 사명은 파괴입니다"라고 거절했다. 같은 해, Musée des Arts Décoratifs, Paris프랑스어에서 1960년 12월부터 약 3개월 동안 프랑스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뒤뷔페 회고전"이 개최되어 402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원래 근대 미술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여러 사건으로 인해 장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장식 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1967년, 뒤뷔페의 글을 모은 『안내서와 그 후의 전 저작』 2권이 갈리마르사에서 출간되었다.[1] 1981년에는 근대 미술관에서 뒤뷔페 탄생 80주년 기념 "소상(小像)이 있는 풍경"과 "심리=광경" 전시회가 개최되었으며, 카탈로그 서문은 "전통 파괴자 뒤뷔페"였다.[2]

1985년 5월 12일, 뒤뷔페는 파리 자택에서 사망했다.[3] 같은 해 6월, 파리 시립 근대 미술관은 조의를 표하며 27점의 작품을 전시했고, 9월에는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3]

일본에서는 1978년 후지 TV 갤러리, 1982년 세이부 미술관과 국립 국제 미술관, 1997년 5개의 미술관에서 뒤뷔페 전시가 개최되었다.[4]

3. 예술적 특징

뒤뷔페는 1942년부터 다시 예술에 전념하면서 파리 지하철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선택했다. 야수파와 다리파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색상을 사용하고, 좁은 공간에 놓인 인물들을 묘사하여 심리적인 영향을 주었다.[6]

1945년 장 포트리에의 전시에서 영감을 받아, 진흙, 모래 등을 섞은 두꺼운 유화 물감을 사용하고 붓 대신 긁는 방식을 시도했다. 이는 1946년 'Hautes Pâtes' 시리즈로 나타났다.[4]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뒤뷔페를 '미로 이후 파리 학파에서 나온 가장 독창적인 화가'라고 평가했다.[7]

1946년 이후 앙리 미쇼 등 친구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반(反)심리적, 반(反)개인적인 방식을 사용했다. 초현실주의 그룹, 파타피지컬 대학과 교류하고, 앙토냉 아르토, 루이-페르디낭 셀린 등과도 교류했다.

한스 프린츠호른의 ''정신병자의 예술성''에 영향을 받은 뒤뷔페는 아르 브뤼라는 용어를 만들었다.[12]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더 많은 예술과 시가 있다고 믿고, 아르 브뤼를 통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예술을 추구했다. 그의 작품은 벽 낙서나 어린이 그림처럼 원시적이지만, 뒤뷔페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박식하게 글을 썼다.[12]

1948년 장 폴랑 등과 ''라 콩파니 드 라르 브뤼''를 설립,[10] 아르 브뤼를 전시하고 알로이즈 코르바, 아돌프 뵐플리 등의 작품을 수집했다. 이 컬렉션은 로잔의 아르 브뤼 컬렉션에 있으며, "벽 없는 박물관"으로 불린다.[11]

3. 1. 재료와 기법

장 뒤뷔페는 독창적인 재료를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유화로 제작되었으며,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하여 모래, 타르, 등 일상적인 재료를 섞어 두껍게 칠함으로써 독특한 질감을 표현했다.[14] 뒤뷔페는 아스팔트와 같은 두꺼운 페이스트를 사용한 최초의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15] 초기 작품에서 뒤뷔페는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공간을 보다 직접적이고 평면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그림 평면 내에서 물체를 거칠게 겹쳐 원근감을 나타냈으며, 이는 작품에 빽빽한 느낌을 주었다.

1962년부터 뒤뷔페는 빨강, 흰색, 검정, 파랑으로 색상을 제한한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폴리스티렌 조각을 만들고 비닐 페인트로 칠하는 등 조각 작업에 집중했다.

3. 2. 주제와 양식

뒤뷔페는 파리 지하철, 거리 풍경, 시장, 인물 등 평범한 일상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야수파의 색채와 다리파 화가들의 불협화음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상을 사용했다.[6] 장 포트리에의 영향을 받아 진흙, 모래, 석탄 가루 등 다양한 재료를 섞어 두꺼운 질감의 그림을 그렸다. 이를 통해 붓 대신 긁힌 자국이나 칼자국과 같은 흔적을 남기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다.[4]

뒤뷔페는 원근법을 무시하고 대상을 평면적으로 묘사하여 전통적인 회화의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의도적으로 반(反)심리적, 반(反)개인적인 방식으로 초상화를 그렸다. 어린이 그림이나 낙서와 같이 단순하고 직관적인 형태를 통해 순수하고 원초적인 예술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아르 브뤼는 정신병자, 수감자, 어린이와 같이 비전문가들이 창작한 예술을 칭하는 용어로, 뒤뷔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더 많은 예술과 시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12] 그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예술 형태를 추구하며, 자신의 작품이 원시적이고 유치하게 보이기를 의도했다.[12]

3. 3. 아르 브뤼 (Art Brut)

뒤뷔페는 1945년 장 포트리에의 회화 전시회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 진흙, 모래, 석탄 가루 등 다양한 재료를 섞은 두꺼운 유화 물감을 사용하는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4] 이러한 재료 사용은 비평가들의 반발을 샀지만,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뒤뷔페를 '미로 이후 파리 학파에서 나온 가장 독창적인 화가'라고 평가했다.[7]

한스 프린츠호른의 저서 ''정신병자의 예술성''에 영향을 받은 뒤뷔페는[29] 정신과 환자, 수감자, 어린이들의 예술과 같이 미적 규범 밖에서 활동하는 비전문가들이 제작한 예술을 가리키는 '아르 브뤼'(Art Brut, "원시 예술"을 의미하며 종종 '아웃사이더 아트'라고도 불림)라는 용어를 만들었다.[12] 뒤뷔페는 평범한 사람들의 단순한 삶이 학문적인 예술보다 더 많은 예술과 시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아르 브뤼를 통해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예술 형태를 찾고자 했다.[12] 그의 작품은 종종 벽 낙서나 어린이 그림에 비유될 정도로 원시적이고 유치하게 보이지만, 뒤뷔페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매우 박식하게 글을 썼다.[12]

1948년 6월, 뒤뷔페는 장 폴랑, 앙드레 브르통 등과 함께 파리에서 ''라 콩파니 드 라르 브뤼''(La Compagnie de l'art brut, 아르 브뤼 컴퍼니)를 공식 설립하고,[10] 아르 브뤼의 발견, 기록, 전시를 위해 헌신했다. 뒤뷔페는 알로이즈 코르바와 아돌프 뵐플리를 포함한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수집하여 자신만의 컬렉션을 구축했다.[10] 이 컬렉션은 현재 스위스 로잔에 있는 아르 브뤼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으며,[10] "벽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기도 한다.[11]

뒤뷔페의 컬렉션은 1967년 파리 장식 미술관에서 처음 전시되어 공적으로 인지되었다.[32] 1976년에는 스위스 로잔에 아르 브뤼 컬렉션이 개관하였다. 뒤뷔페의 '아르 브뤼'는 세련된 예술에 대한 반(反)문화적인 개념으로, 미술계의 인식을 재구축하고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33]

4. 주요 작품


  • 소와 미용사 (1943년 8월)
  • 유령 기념비 (1977)
  • 넝마주이 (1978)
  • 서 있는 짐승 기념비 (1984)
  • 2019년 6월 25일, 뒤뷔페의 작품 《세레모니(Cérémonie)》가 크리스티 경매에서 8718750GBP (11100000USD)에 판매되면서 경매 기록을 세웠다.[24][25]
  • 2021년 4월 15일, 뒤뷔페의 《비옥한 날(La féconde journée)》(1976)이 런던에서 열린 필립스 미술품 경매에서 4378500GBP (6369265USD)에 낙찰되었다.[26][27]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주요 작품

  • 『유쾌한 밤』 (1949년) 국립 국제 미술관
  • 『부인의 몸』 (1950) 국립 서양 미술관
  • 『작품』 (1948) 오하라 미술관
  • 『두 명의 탈주병』 (1953) 아이치 현립 미술관
  • 『날갯짓』 (1961) 후쿠오카 시 미술관

4. 1. 회화

미묘한 코를 가진 소(1954년)는 소의 모습을 단순화하고 원시적인 형태로 표현한 작품이다.

4. 2. 조각

1960년대 말, 뒤뷔페는 '투르 오 퓌귀르',[18] '자르댕 디베르', 그리고 사람들이 거닐고, 머물고, 사색할 수 있는 '빌라 팔발라'[19]와 같은 대형 조각-주거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크뢸러-뮐러 미술관을 위해 디자인된 매우 큰 야외 페인팅 조각인 ''자르댕 데마유''를 제작했다.[20]

  • ''소와 미용사''(1943년 8월)
  • ''미묘한 코를 가진 소''(1954년)
  • ''네 그루의 나무'' (1972)
  • ''넝마주이''(1978)
  • ''유령 기념비''(1977)
  • ''서 있는 짐승 기념비''(1984)
  • --

5. 영향

뒤뷔페는 1942년 다시 예술에 전념하기 시작하면서 파리 지하철에 앉아 있거나 시골을 걷는 사람들처럼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들을 선택했다. 그는 야수파의 색채와 다리파 화가들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관람객에게 뚜렷한 심리적 영향을 미쳤다.[6]

1943년, 작가 조르주 랑부르가 장 폴랑을 뒤뷔페의 작업실로 데려왔고, 폴랑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만남은 뒤뷔페에게 전환점이 되었다.[6] 1944년 10월 파리의 갤러리 르네 드루앙에서 열린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은 기성 예술가가 되기 위한 세 번째 시도였다.[4]

1945년, 뒤뷔페는 장 포트리에의 회화 전시회를 보고, 인간의 깊이를 순수하게 표현하는 예술에 감명을 받았다. 포트리에의 영향을 받아 뒤뷔페는 진흙, 모래, 석탄 가루 등 다양한 재료를 섞은 두꺼운 유화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붓 대신 긁힌 자국이나 칼자국과 같은 물리적인 흔적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기법은 1946년 갤러리 르네 드루앙에서 열린 ''Microbolus Macadam & Cie/Hautes Pates'' 전시에서 'Hautes Pâtes' 시리즈로 잘 나타났다. 그의 조악한 재료 사용은 비평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4]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뒤뷔페를 "호안 미로 이후 파리 학파에서 나온 가장 독창적인 화가"라고 평했다.[7]

1946년 이후, 뒤뷔페는 앙리 미쇼, 프랑시스 퐁주 등 친구들의 초상화 시리즈를 제작했다. 이 초상화들은 두꺼운 재료를 사용하고 의도적으로 반심리적이고 반개인적인 방식으로 그려졌다. 그는 초현실주의 그룹, 파타피지컬 대학에 접근했고, 앙토냉 아르토, 루이-페르디낭 셀린 등과 교류했다. 특히 1944년 프랑스 레지스탕스 작가이자 출판인인 장 폴랑과 중요한 관계를 맺었다.

뒤뷔페는 1946년 피에르 마티스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미국 미술 시장에서 빠르게 성공했다. 마티스는 미국에서 현대 유럽 미술의 영향력 있는 딜러였으며, 뒤뷔페의 작품은 피카소, 브라크 등과 함께 전시되었다. 뉴스위크는 뒤뷔페를 '파리 아방가르드 서클의 연인'이라고 칭했고, 그린버그는 그의 캔버스에 대해 긍정적으로 썼다. 1947년 뒤뷔페는 미국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평론가들의 호의적인 반응 덕분에 정기적인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7]

뉴욕에서의 초기 활동 덕분에 뒤뷔페는 미국 미술계에서 꾸준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파리파와의 연계를 통해 미국 관객에게 다가갔지만, '회화의 위대한 전통'에 강하게 반발했다. 미국인들은 뒤뷔페의 작품에 흥미를 느꼈고, 이는 당시 아방가르드 전통 안에서 지위를 얻으려 노력했던 뉴욕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8] 알폰소 A. 오소리오와 조셉 글래스코는 뒤뷔페의 예술에 관심을 보인 대표적인 미국 예술가들이다. 1949년 말, 오소리오는 파리에서 뒤뷔페를 만나 그의 그림을 샀고, 1950년, 오소리오의 권유로 글래스코는 뒤뷔페를 만나기 위해 파리로 갔다.[9]

1985년 5월 12일, 뒤뷔페는 파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파리 시립 근대 미술관은 조의를 표하며 작품을 전시했고,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일본에서는 1978년, 1982년, 1997년에 뒤뷔페 전시가 개최되었다.

5. 1. 미술사적 영향

뒤뷔페는 20세기 후반 서구 미술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앵포르멜, 아웃사이더 아트, 신표현주의 등 다양한 미술 사조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실험적인 재료 사용과 기법은 후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현대 미술의 표현 영역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5년, 뒤뷔페는 장 포트리에의 회화 전시회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포트리에의 작품에서 그는 인간의 깊이를 직접적이고 순수하게 표현하는 예술을 발견했다. 포트리에의 영향을 받아 뒤뷔페는 진흙, 모래, 석탄 가루, 자갈, 유리 조각, 끈, 짚, 석고, 시멘트, 타르 등 다양한 재료를 섞은 두꺼운 유화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재료를 통해 그는 붓으로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칠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긁힌 자국이나 칼자국과 같은 물리적인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이러한 임파스토 기법은 1946년 갤러리 르네 드루앙에서 열린 ''Microbolus Macadam & Cie/Hautes Pates'' 전시에서 'Hautes Pâtes' 또는 두꺼운 임파스토 시리즈로 잘 나타났다.

뒤뷔페의 조악한 재료 사용과 작품에 담긴 아이러니는 비평가들로부터 '무정부주의', '쓰레기통 뒤지기'와 같은 비판을 받았다.[4] 그러나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뒤뷔페는 호안 미로 이후 파리 화파에서 나온 가장 독창적인 화가로 보인다..."[7]라고 평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린버그는 뒤뷔페를 "지난 10년 동안 파리에 등장한 진정한 중요성을 가진 유일한 새로운 화가"라고 칭찬했다.[7]

뒤뷔페는 아방가르드 전통 안에서 지위를 얻으려는 뉴욕 미술계의 열망과 맞물려 미국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8] 그의 작품은 알폰소 A. 오소리오, 조셉 글래스코 등 미국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9]

1948년 6월, 뒤뷔페는 장 폴랑, 앙드레 브르통 등과 함께 '아르 브뤼 컴퍼니'(La Compagnie de l'art brut)를 설립하고, 아르 브뤼의 발견, 기록, 전시를 위해 헌신했다.[10] 뒤뷔페는 알로이즈 코르바, 아돌프 뵐플리 등 아르 브뤼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여 자신만의 컬렉션을 구축했으며, 이 컬렉션은 현재 스위스 로잔의 아르 브뤼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아르 브뤼 컬렉션은 국가적, 민족적 경계를 초월하고 국적과 문화 사이의 장벽을 허물었다는 점에서 "벽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기도 한다.[11]

뒤뷔페는 한스 프린츠호른의 저서 ''정신병자의 예술성''의 영향을 받아 정신과 환자, 수감자, 어린이들의 예술과 같이 미적 규범 밖에서 활동하는 비전문가들이 제작한 예술을 가리키는 '아르 브뤼'(art brut, "원시 예술")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단순한 삶이 학문적인 예술보다 더 많은 예술과 시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뒤뷔페는 소수의 전문가가 아닌 퇴근 후 집에 돌아오는 거리의 사람들을 위한 예술을 추구했으며,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예술 형태를 찾고자 했다.[12] 그의 작품은 원시적이고 유치하게 보일 수 있지만, 뒤뷔페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매우 박식하게 글을 썼다. 미술 평론가 힐튼 크레이머는 뒤뷔페의 에세이가 그의 자유롭고 가르침을 받지 않은 원시주의에 대한 주장을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지적 세련미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13]

1946년 파리의 르네 드루앙 화랑에서 열린 "미로볼류스 마카담 상회, 후도(厚塗)" 개인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양 미술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동시에 앵포르멜 등 1950년대 이후 새로운 미술 흐름의 원점으로 평가받는다.

1960년에는 Musée des Arts Décoratifs, Paris|파리 장식 미술관프랑스어에서 프랑스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뒤뷔페 회고전이 개최되어 402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5. 2. 한국 미술에의 영향

뒤뷔페의 아르 브뤼 개념은 1960년대 이후 한국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예술은 앵포르멜 운동과 단색화 등 추상미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뒤뷔페의 예술 세계는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양한 예술적 표현을 포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 아르 브뤼 컬렉션

1945년 뒤뷔페는 '아르 브뤼(Art Brut)', 즉 '생(生)의 예술'이라고 명명한 강박적인 환시자나 정신 장애자의 작품에서, 정신의 심연의 충동이 날 것 그대로 표출되어 르네상스 이후의 아름다운 예술(Beaux-Arts)에 반문화적이라고 생각했다.[30] 192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부속 병원의 프린츠호른의 저서 『정신병자의 예술성』을 입수하고, 프랑스와 스위스의 정신병원을 방문하여 작품을 찾았다.[29][30]

1945년 7월, 뒤뷔페는 스위스 베른 근교의 정신병원에 있는 작은 미술관을 방문하여 아돌프 뵐플리 등의 작품을 보고 감동받았다. 이후 그는 작품을 사진에 담는 것을 목적으로 로잔, 제네바 등지를 방문했다. 1945년 말에는 화랑 경영자 드루앙과 함께 두 번째 스위스 탐방을 통해, 스스로 독학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뷔페는 수집 목적이 없었지만, 소개를 통해 많은 작품을 기증받아 컬렉션을 이루게 되었다.

1947년, 뒤뷔페는 많은 사람에게 인간이 가진 예술 충동을 알리고자 드루앙에게서 화랑 지하를 제공받아 '생의 예술 센터'(포와이에 다르 브뤼)를 개관했다. 1948년에는 이 센터를 영구적인 연구소로 만들기 위해 '아르 브뤼 협회'를 설립하고, 1951년에는 100명의 작가에 의한 1200점의 컬렉션을 완성했다. 그러나 자금 부족 등으로 협회는 해산되었다.

뒤뷔페의 컬렉션은 1967년 파리 장식 미술관에서 처음 전시되어 공적으로 인지되었다.[32] 이후 뒤뷔페는 수집한 컬렉션의 영구적인 관리를 맡길 장소를 찾기 시작했고, 스위스 로잔 시장과 계약을 맺어 1976년 2월 벨뵈르 거리에 아르 브뤼 컬렉션이 개관했다.

참조

[1] 뉴스 Entre Dubuffet et Chaissac, un lien passionnel https://www.lemonde.[...] 2013-07-22
[2] 서적 Georges Limbour: le songe autobiographique Lachenal & Ritter 1994
[3] 간행물 'Journal de l''année' http://gallica.bnf.f[...] 1986
[4] 서적 The Work of Jean Dubuffet, with Texts by the Artist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62
[5] 서적 Duchamp Is My Lawyer: The Polemics, Pragmatics, and Poetics of [[UbuWeb]] Columbia University Press
[6] 기타 Colin-Picon, op. cit.
[7] 논문 I Think Your Work Looks A Lot Like Dubuffet: Dubuffet and America, 1946-1962 1997
[8] 논문 I Think Your Work Looks A Lot Like Dubuffet: Dubuffet and America, 1946-1962 1997
[9] 서적 Joseph Glasco: The Fifteenth American Cacklegoose Press
[10] 논문 Dubuffet, Levi-Strauss, and the Idea of Art Brut 2004
[11] 논문 Dubuffet, Levi-Strauss, and the Idea of Art Brut 2004
[12] 서적 The Work of Jean Dubuffet, with Texts by the Artist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62
[13] 웹사이트 Playing the Primitive 1962-05
[14] 서적 Five Europeans: Bacon, Balthus, Dubuffet, Giacometti The Gallery 1966
[15] 서적 Jean Dubuffet Drawings Arts Council 1966
[16] 웹사이트 Notice www.bilan.ch https://www.bilan.ch[...] 2023-07-03
[17] 웹사이트 dossier didactique https://docplayer.fr[...]
[18] 기타 classified as Monument historique by the French https://www.pop.cult[...]
[19] 기타 https://www.pop.cult[...]
[20] 웹사이트 Jardin d'émail, 1974 https://krollermulle[...] Kröller-Müller Museum 2022-11-19
[21] 뉴스 Jean Dubuffet, Painter and Sculptor, Is Dead https://www.nytimes.[...] 2019-03-21
[22] 서적 Jean Dubuffet Paintings Arts Council 1966
[23] 웹사이트 Jean Dubuffet: Un barbare en Europe https://www.mucem.or[...] 2019-11
[24] 웹사이트 Dubuffet work from 1961 makes top price in London https://www.christie[...] 2019-06-25
[25] 웹사이트 Jean Dubuffet (1901-1985), Cérémonie (Ceremony) https://www.christie[...] 2024-10-16
[26] 웹사이트 Phillips's Spring Contemporary Art Evening Sale in London Generated a Solid £24.8 Million, Up Nearly a Fifth From Last Year https://news.artnet.[...] 2021-04-15
[27] 웹사이트 Jean Dubuffet, La féconde journée https://www.phillips[...] 2024-10-16
[28] 웹사이트 学芸員が選ぶ隠れた名作 http://www.bridgesto[...] ブリヂストン美術館 2018-08-11
[29] 서적 精神病者はなにを創造したのか ミネルヴァ書房 2014
[30] 논문 カヴァリング・アウトサイド-アウトサイダー・アートの政治学 1999-04
[31] 간행물 2017-02
[32] 서적 パラレル・ヴィジョン―20世紀美術とアウトサイダー・アート 淡交社
[33] 서적 パラレル・ヴィジョン―20世紀美術とアウトサイダー・アート 淡交社
[34] 뉴스 Entre Dubuffet et Chaissac, un lien passionnel https://www.lemonde.[...] 2013-07-22
[35] 서적 Georges Limbour: le songe autobiographique Lachenal & Ritter 1994
[36] 서적 The Work of Jean Dubuffet, with Texts by the Artist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6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